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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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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친위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는 1943년 3월 크로아티아 SS 의용 사단으로 창설되어, 최종적으로 제13 SS 무장 산악 사단 "한트샤르" (크로아티아 제1)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단명인 "한트샤르"는 무슬림이 휴대하는 단검에서 유래했다. 사단은 보스니아 무슬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칼라 배지에는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사용되었다. 사단은 게릴라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훈련 중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영국군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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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사단 차량 기호
존속 기간1943년–1945년
국가나치 독일
크로아티아 독립국
소속무장친위대
병과산악엽병
역할파르티잔 작전
규모사단 (최대 17,000명)
지휘 구조V SS 산악 군단
IX SS 무장 산악 군단 (크로아티아)
LXVIII 육군 군단
별칭한트샤르
전투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유고슬라비아 전선
작전명 바이스
작전명 자우베르
작전명 오스터아이
작전명 마이바움
작전명 마이글뢰크헨
작전명 폴몬트
작전명 하이데로제
작전명 하크플라이쉬
동부 전선
봄의 각성 작전
지휘관
주요 지휘관카를-구스타프 자우버츠바이크
데시데리우스 함펠

2. 사단명의 변천

날짜사단명
1943년 3월크로아티아 SS 의용 사단
1943년 10월제13 SS 의용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산악 사단 (크로아티아)
1944년 6월제13 SS 무장 산악 사단 "한트샤르" (크로아티아 제1)


3. "한트샤르" 부대명의 유래

사단명에 있는 '''한트샤르''' ('''한자르''')는 원래 아랍어로 '''خنجر''' (Khanjar/한자르)라고 표기되는, 무슬림 성인 남자가 휴대하는 초승달 모양의 단검에서 유래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에서는 '''Handžar'''라고 표기하며, 무슬림이 휴대하는 굽은 칼을 가리킨다. 보스니아의 역사적인 표징으로 사단장이나 칼라에 사용되었다.

한편, 일본 문헌에서는 한토샤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Handschar의 철자가 우연히 독일어의 Hand (한트, 손의 의미)와 Schar (샤르, 농기구인 쟁기 또는 인간이나 동물의 무리를 의미)와 비슷하게 보이는 데서 비롯된 오해이며, 한자르라는 표기가 원음에 충실하다.

4. 역사적 배경

SS 제복을 입고 페즈 머리 장식을 한 세 명의 군인이 팜플렛을 읽고 있다
제13 SS 사단의 군인들. 1943년 "이슬람과 유대교"에 관한 책자를 보고 있다.


한자르를 든 손을 디자인한 칼라 배지


1942년 12월, 하인리히 힘러와 고틀로프 베르거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스니아 무슬림 SS 사단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했다.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의 안보 상황 악화에 우려를 표했는데, 이는 독일 군사 인력을 묶어두는 요인이었다. 독일 소식통에 따르면, 1943년까지 10만 명 이상의 보스니아 무슬림이 사망했고 25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또한 심각한 식량 부족이 지역을 위협했다. 아르투르 플렙스는 "무슬림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박해받는 특별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힘러는 이슬람교에 개인적으로 매료되었고, 이슬람교가 두려움 없는 군인을 만든다고 믿었다. 그는 무슬림 남성이 완벽한 SS 병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슬람교가 "싸우다 죽으면 천국을 약속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힘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병대의 활약에 영감을 받아, 보스니아 무슬림 SS 사단을 통해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연대를 부활시키려 했다.

히틀러는 1943년 2월 중순에 이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고, 힘러는 제7 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의 사령관 플렙스에게 비게르만족 출신으로 구성된 최초의 SS 사단을 창설하는 책임을 맡겼다.

1943년 3월 5일에 사단 창설이 시작되어 7월까지 2만 명에 달했다. 제복은 통상적인 친위대의 것이었지만, 칼라 배지는 SS의 룬 문자가 아닌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들어갔다. 또한 무슬림이 다수였던 점을 고려하여 중동 지역 전통의 모자인 페즈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편 비무슬림 대원은 통상적인 친위대 등산모를 썼다.

4. 1. 크로아티아 독립국(NDH)과 안테 파벨리치

1941년 4월 6일, 추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침공한 후, 이탈리아 왕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극단적인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이자 파시스트인 안테 파벨리치우스타샤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국가의 포글라브니크|지도자hr로 임명되었다. 이 국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흔히 NDH, Nezavisna Država Hrvatskahr에서 유래)로 불렸다. NDH는 현대 크로아티아의 거의 전부, 현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전부, 현대 세르비아 일부를 "이탈리아-독일의 준-보호령"으로 통합했다. NDH 당국은 우스타샤 민병대가 주도하여, 새로운 국가의 경계 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인구에 대한 집단 학살 정책을 시행했다.

파벨리치는 보스니아 무슬림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그레브의 재산을 모스크로 개조하여 "포글라브니크 모스크"라고 명명했다. 파벨리치의 크로아티아인과의 평등 보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무슬림들은 크로아티아 통치에 빠르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한 무슬림 지도자는 행정부에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한 무슬림이 한 명도 없다고 보고했다. 비록 과장이었지만, 무슬림은 정부 직위에서 과소 대표되었으며, 20개의 장관직 중 단 2개만 차지했다. 6명의 국무 장관 중 무슬림은 없었고, 총 206명 중 13명의 무슬림 "인민 대표"만이 있었다.

NDH 영토에서 우스타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체트니크 및 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사이의 격렬한 전투가 발발했다. 일부 우스타샤 민병대 부대는 무슬림이 공산주의자 동조자라고 확신하고 그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많은 민간인을 살해했다. 체트니크는 무슬림이 세르비아인에 대한 우스타샤 폭력에 가담했다고 비난하고 무슬림 인구에 대해 유사한 만행을 저질렀다. 무슬림은 NDH의 정규군인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부터 거의 보호를 받지 못했는데, 독일군은 이를 "전투 가치가 최소"라고 묘사했다. 지역 민병대가 소집되었지만, 이들 역시 가치가 제한적이었으며, 무하메드 하지예펜디치가 이끄는 투즐라에 기반을 둔 국토 방위군 하지예펜디치 군단만이 의미가 있었다.

4. 2. 보스니아 무슬림의 저항과 보호 요청

1941년 4월, 추축국유고슬라비아 왕국 침공 이후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이 수립되었다. NDH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에 대한 집단 학살 정책을 시행했다.

파벨리치는 보스니아 무슬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그레브의 건물을 모스크로 개조하기도 했지만, 많은 무슬림들은 크로아티아 통치에 불만을 품었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행정부 내 무슬림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무슬림은 정부 고위직에서 매우 적은 수를 차지했다. NDH 영토에서는 우스타샤, 체트니크,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우스타샤 민병대 일부는 무슬림을 공산주의자 동조자로 간주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체트니크는 무슬림이 세르비아인에 대한 우스타샤의 폭력에 가담했다고 비난하며 무슬림에게 보복성 만행을 저질렀다. 무슬림은 NDH 정규군인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부터 거의 보호받지 못했으며, 지역 민병대도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했다.

보스니아 무슬림 엘리트와 유력 인사들은 NDH와 독일 당국에 세르비아인 학살과 차별 법률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안은 프리예도르, 사라예보, 모스타르, 바냐루카, 비옐리나, 투즐라 등에서 발표되었다. 이들은 무슬림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무슬림과 세르비아인을 이간질하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우스타샤 정권 초기부터 무슬림들은 우스타샤와 크로아티아 정부 당국이 세르비아인에게 저지르는 불법 행위를 두려워했다고 선언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NDH의 우스타샤 통치에 불만을 느끼고 보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 시대에 대한 향수와 독일을 향한 우호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NDH 내에서 자율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1942년 11월, 자율주의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슬림 보호를 위해 보스니아에 자율적인 "정치 행정 당국"을 설립하도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5. 사단의 기원

1942년 12월 6일,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와 무장 친위대 징집 책임자인 고틀로프 베르거는 히틀러에게 보스니아 무슬림 SS 사단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했다. 독일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의 안보 상황 악화에 우려했는데, 이는 다른 곳에 필요한 독일 군사 인력을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독일 소식통에 따르면 1943년까지 10만 명 이상의 보스니아 무슬림이 사망했고 25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또한 심각한 식량 부족이 지역을 위협했다. 아르투르 플렙스는 "무슬림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박해받는 특별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힘러가 보스니아 무슬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생각은 사단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42년 11월 1일자 각서에는 지도적인 무슬림 자치주의자들이 이미 독일 사령부 하에 자원 무장 친위대 부대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힘러는 이슬람교에 개인적으로 매료되었고 이슬람교가 두려움 없는 군인을 만든다고 믿었다. 그는 그들의 맹렬함이 기독교인들의 온화함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군사적 자질을 더욱 발전시키고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무슬림 남성이 완벽한 SS 병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슬람교가 "싸우다 죽으면 천국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민족적 배경과 SS 요건에 관해서는, 힘러가 크로아티아 및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한 이론, 즉 무슬림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민족이 슬라브족이 아니라 고트족 또는 이란 민족의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힘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병대의 두드러진 성공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보스니아 무슬림 SS 사단의 형태로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연대를 부활시켜 '오래된 오스트리아' 전통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일단 창설된 이 사단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부대가 보스니아 북동부에서 작전하는 것을 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지역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 이 지역에서 힘러의 주요 관심사는 현지 무슬림 인구의 안보가 아니라 북쪽 스렘에 있는 민족 독일인 정착민들의 복지였다. "스렘(스르롐)은 크로아티아의 곡창지대이며, 바라건대 그것과 우리의 사랑하는 독일 정착촌이 확보될 것입니다. 스렘 남쪽 지역이 ... 보스니아 사단에 의해 해방되어 ... 이 터무니없는 (크로아티아) 국가에서 적어도 부분적인 질서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틀러는 1943년 2월 중순에 이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고, 힘러는 제7 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의 사령관인 플렙스를 비게르만족 출신으로 구성된 최초의 SS 사단을 창설하는 책임을 맡겼다.

1943년 3월 5일에 사단 창설이 시작되어 7월까지 2만 명에 달했다. 제복은 통상적인 친위대의 것이었지만, 칼라 배지는 SS의 룬 문자가 아닌,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들어갔다. 또한 무슬림이 다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여 중동 지역 전통의 모자 "페즈"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편 비무슬림 대원은 통상적인 친위대 등산모를 썼다.

6. 모집

1943년 2월 18일, 아르투어 푈프스는 독일 외무부 특사 지크프리트 카셰와 크로아티아 독립국(NDH) 외무 장관 믈라덴 로르코비치를 만나 사단 창설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NDH 정부는 사단 창설에 동의했지만, 사단의 모집 및 통제 방식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로르코비치는 사단의 명칭을 "SS 우스타샤 사단"으로 하고, 보스나", "크라이나", "우나"와 같은 지명을 딴 연대 이름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무슬림으로만 구성된 사단이 독립 요구를 도울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타협안으로 공식 명칭에 "크로아티아"를 포함시키고, 가톨릭 크로아티아 장교들을 모집했다.

히믈러와 푈프스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구사하는 이슬람 전문가 카를 폰 크렘플러(SS-슈탄다르텐퓌러de)에게 사단 조직을 맡겼다. 1943년 3월 3일, 푈프스는 NDH 정부 대표 알리야 슐략과 함께 일할 폰 크렘플러를 만났다. 3월 20일부터 18일 동안 폰 크렘플러와 슐략은 11개 보스니아 지역을 순회하며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SS의 지원으로 지비니체와 그라차니차 마을에서 모집 집회가 열렸다.

슐략과 폰 크렘플러는 제안된 사단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곧 갈등을 겪었다. 슐략은 폰 크렘플러의 세르비아 방언과 모집 활동 중 우스타샤 상징 대신 전통적인 이슬람 색상과 문장(녹색 깃발과 초승달)을 사용한 점을 비판했다. 폰 크렘플러는 투즐라에서 민병대 지도자 하지에펜디치를 만나 사라예보로 이동하여 보스니아 이슬람 성직자 지도자 레이스 울 울레마 하피즈 무하메드 판자 등 주요 무슬림 정치인들을 만났다. NDH 정부와 카셰는 폰 크렘플러의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했지만, SS는 이를 무시하고 폰 크렘플러는 NDH 무장 병력의 탈영병을 포함하여 모집을 계속했다.

1943년 3월 5일에 사단 창설이 시작되어 7월까지 2만 명에 달했다. 제복은 통상적인 친위대의 것이었지만, 칼라 배지는 SS의 룬 문자가 아닌,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들어갔다. 또한 무슬림이 다수였던 점을 고려하여 중동 지역 전통의 모자 "페즈"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편 비무슬림 대원은 통상적인 친위대 등산모를 썼다.

6. 1. 예루살렘 대무프티의 개입

1943년 3월에서 4월 사이, 하인리히 히믈러와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 무슬림 지도자들은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던 예루살렘 대무프티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에게 무장 친위대 및 기타 부대에 무슬림을 조직하고 모집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터키어를 구사하는 SS-슈탄다르텐퓌러de 카를 폰 크렘플러의 호위를 받았다. 1943년 3월 30일부터 4월 10일까지 무프티는 자그레브, 사라예보바냐루카를 방문하여 고위 무슬림 지도자들을 만나고 새 사단을 지지하는 선동을 했다. 무프티는 또한 사단을 축복하고 사열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나치식 경례를 사용했다. 무프티는 "이 사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보스니아 지원병의] 조국과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사단이 보스니아를 떠나는 것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독일인들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는 1943년 11월 훈련 중 카를 구스타프 자우버츠바이크()와 함께 보스니아계 SS 지원병을 사열하고 있다.

6. 2. 가톨릭 크로아티아인 모집

아르투어 푈프스는 1943년 2월 18일 나치 독일 외무부 특사 지크프리트 카셰, 안테 파벨리치를 대표하는 믈라덴 로르코비치와 사단 창설 협상을 진행했다. 파벨리치는 사단 창설에 동의했지만, 무장 친위대와 크로아티아 독립국(NDH) 정부는 사단 모집 및 통제 방식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로르코비치는 "보스나", "크라이나", "우나"와 같은 지명을 딴 연대 이름을 제안하며, 무슬림으로만 구성된 사단이 독립 요구를 도울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했다. 타협안으로 공식 명칭에 "크로아티아"를 포함시키고, 가톨릭 크로아티아 장교들을 모집했다. 히믈러와 푈프스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사단을 창설했고, NDH는 특히 민족 구성에 불만을 품었다.

히믈러와 푈프스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구사하는 이슬람 전문가 카를 폰 크렘플러에게 사단 조직을 맡겼다. 1943년 3월 3일, 푈프스는 NDH 정부 대표 알리야 슐략과 함께 일할 폰 크렘플러를 만났다. 1943년 3월 20일 폰 크렘플러와 슐략은 11개 보스니아 지역을 순회하며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지비니체와 그라차니차 마을에서 모집 집회가 열렸다.

슐략과 폰 크렘플러는 사단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갈등을 겪었다. 슐략은 폰 크렘플러의 세르비아 방언과 모집 활동 중 우스타샤 상징 대신 전통적인 이슬람 색상과 문장(녹색 깃발과 초승달)을 사용한 점을 비판했다. 폰 크렘플러는 투즐라에서 민병대 지도자 하지에펜디치를 만나 사라예보로 이동하여 보스니아 이슬람 성직자 지도자 레이스 울 울레마 하피즈 무하메드 판자 등 주요 무슬림 정치인들을 만났다. NDH 정부와 카셰는 폰 크렘플러의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했지만, SS는 이를 무시하고 폰 크렘플러는 NDH 무장 병력의 탈영병을 포함하여 모집을 계속했다.

아민 알후세이니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모집은 부족했다. 히믈러는 10%의 기독교인 구성원을 허용했지만, 충분한 무슬림을 모집하지 못해 2,800명의 가톨릭 크로아티아인이 입대했다. 이는 히믈러가 원했던 가톨릭 신자와 무슬림의 비율보다 높았다.

자원한 보스니아 군 장교 중 최고위급은 후세진 비슈체비치였다. 그는 1943년 8월 사단의 대공포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SS-Obersturmbannführerde로 임명되었으나,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독일인으로 교체되었다.

1943년 3월 5일 사단 창설이 시작되어 7월까지 2만 명에 달했다. 제복은 통상적인 친위대의 것이었지만, 칼라 배지는 SS의 룬 문자가 아닌,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들어갔다. 또한 무슬림이 다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여 중동 지역 전통의 모자 "페즈"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비무슬림 대원은 통상적인 친위대 등산모를 썼다.

7. 구성

훈련 중인 사단 구성원


사단의 초기 구성에 대한 자료는 서로 다르다. 파블로비치는 사단 신병의 60%가 무슬림이었고, 나머지는 사단의 장교부사관을 대부분 차지한 유고슬라비아 ''폭스도이체''였다고 주장한다. 토마세비치는 23,200명의 무슬림과 2,800명의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독일 장교였다고 언급한다. 그는 또한 이 사단이 26,000명의 병력으로 무슬림 SS 사단 중 가장 규모가 컸다고 진술한다. 레프레는 사단의 지정 병력이 26,000명에서 21,000명으로 감소했다고 밝혔고, 코헨은 1944년 4월 사단의 최대 병력이 17,000명에 달했다고 말한다.

사단은 모든 독일인으로 구성된 군사 통신 대대를 제외하고 각 대대마다 무슬림 이맘을 배치했다. 약 6개월 동안 이 사단은 코소보와 산자크 지역 출신의 약 1,000명의 민족 알바니아인을 포함했는데, 이들은 2연대 1대대, 나중에는 28연대 1대대(I/28)가 되었다. 사단이 훈련을 완료했을 때, 장교와 부사관 모두 지정 병력보다 약 3분의 1 정도 부족했고, 장교단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인이었다. 대부분의 장교와 부사관은 다른 무장친위대 사단의 보충 부대에서 차출되었다.

1943년 3월 5일에 사단 창설이 시작되어 7월까지 2만 명에 달했다. 제복은 통상적인 친위대의 것이었지만, 칼라 배지는 SS의 룬 문자가 아닌,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들어갔다. 또한 무슬림이 다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여 중동 지역 전통의 모자 "페즈"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편 비무슬림 대원은 통상적인 친위대 등산모를 썼다.

8. 편성과 훈련, 그리고 반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는 초기 편성과 훈련을 위해 프랑스 남부로 보내졌으며, 주로 아베롱로제르 주(데파르트망)의 마을에 수용되었다. 공식 창설 후 오랫동안 이 사단은 이름이 없었고, "크로아티아 SS 의용 사단" 또는 "무슬림 사단"으로 불렸다. 무장친위대가 보스니아 외부에서 사단을 창설하고 훈련시키기로 한 결정은 NDH의 독일 전권 대사 에드문트 글라이제 폰 호르스테나우가 제시한 조언에 반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현실이 되었다.

1943년 8월 9일, 카를-구스타프 자우버츠바이크 대령이 폰 오버부르처로부터 사단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자우버츠바이크는 무장친위대로 전출되어 SS-상급지도자de 계급을 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8세의 소대장으로 훈장을 받았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단계에서 연대장으로 복무하다 부상을 입은 프로이센 출신이었다. "검증된 지도자"였던 그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곧 사단 병사들의 지속적인 존경과 애정을 얻었다.

1952년 빌프랑슈에서 공개된 "유고슬라비아 전사자" 기념비


1943년 3월 5일에 사단 창설이 시작되어 7월까지 2만 명에 달했다. 제복은 통상적인 친위대의 것이었지만, 칼라 배지는 SS의 룬 문자가 아닌, 한자르를 든 손의 마크가 들어갔다. 또한 무슬림이 다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여 중동 지역 전통의 모자인 페즈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편 비무슬림 대원은 통상적인 친위대 등산모를 썼다.

이후 사단은 빌프랑슈드루에르그 반란을 겪은 후, 실레지아에서 훈련을 완료하였다.

8. 1. 빌프랑슈드루에르그 반란 (1943년 9월)

1943년 9월 16일에서 17일 밤, 프랑스 빌프랑슈드루에르그에서 훈련 중이던 제13SS사단에서 친파르티잔 성향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병대대 내에서 무슬림과 가톨릭 소위 장교들의 지휘 아래 대부분의 독일군을 사로잡고, 대대장 SS-Obersturmbannführerde 오스카 키르히바움을 포함한 5명의 독일 장교를 처형했다. 반란군은 많은 사병들이 자신들에게 합류하여 서방 연합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페리드 자니치, 보조 젤리네크(일명 에두아르 마투티노비치), 니콜라 부켈리치, 루트피야 디즈다레비치가 주도한 이 반란은 부대 이맘인 할림 말코치와 부대 의사인 빌프리드 슈바이거 박사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 말코치는 제1중대 보스니아 사병들에게 그들이 속고 있다고 설득하여 독일 하사관들을 석방하고 중대를 이끌고 주모자들을 추적했다. 슈바이거는 제2중대에서도 같은 행동을 했다. 디즈다레비치와 자니치는 교전 중 사살되었고, 부켈리치는 체포되었으며, 젤리네크는 탈출했다.

반란 진압 후 사망한 반란군 숫자에 대한 자료는 서로 다르다. 토마세비치는 가장 심각한 범죄자 78명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레프레는 14명만 처형되었다고 언급하며 9월 말에 탈영병 4명이 추가로 발견되어 사살되었다고 한다. 코헨은 즉시 약 150명의 반란군이 사망했다고 언급하며, 노엘 말콤은 15명의 반란군이 사망하고 추가적인 "숙청 작전"으로 141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독일군은 이러한 침투가 티토가 자신의 파르티잔 추종자들에게 우수한 무기, 제복, 훈련을 받기 위해 경찰 임무에 입대하도록 제안한 데 기인한다고 보았다. "부적합"하거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간주된 입대자들은 이후 숙청되었다. 결국 825명의 보스니아인들이 사단에서 제거되어 토트 기관de과 함께 노동 봉사를 위해 독일로 보내졌다. 이들 중 265명은 거부하여 노이엔감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중 수십 명이 사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던 보스니아 무슬림 병사들에 대해, 히믈러는 "나는 소수의 배신자들이 사단에 잠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보스니아인들의 충성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 병사들은 20년 전에 그들의 최고 사령관에게 충성했으니, 오늘날에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히믈러는 반란을 막은 말코치와 슈바이거에게 철십자 훈장 2급을 수여했다. 또한 5명의 병사도 훈장을 받았다.

빌프랑슈드루에르그가 1944년에 해방되었을 때, 지역 주민들은 반란군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리 중 하나를 Avenue des Croates프랑스어(지역 주민들은 보스니아 무슬림을 이슬람 신앙을 가진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겼다.)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여전히 매년 9월 17일에 "크로아티아인의 반란"을 기념한다. 코헨은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반란군의 민족성을 감추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인의 반란"으로 이름 변경을 요청했지만, 프랑스는 거부했다고 언급했다. 빌프랑슈드루에르그 봉기는 또한 크로아티아 조각가 반야 라도우시가 설계한 기념비로 도시에서 기념되었다.

8. 2. 실레지아

수백 명의 남자가 무슬림 기도를 위해 무릎을 꿇고 몸을 굽히고 있다
1943년 11월 노이해머에서 훈련 중인 사단 구성원들이 기도하는 모습


반란의 결과, 사단은 훈련을 완료하기 위해 독일 실레지아 지역(현재의 폴란드)에 있는 노이해머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독일 장교들은 훈련 단계에서 보스니아 무슬림의 진전에 만족하여 이들을 위해 '무요'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사단 구성원들은 히틀러와 파벨리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943년 10월 9일, 친위대 본부는 공식적으로 사단의 이름을 13. SS-Freiwilligen b.h. Gebirgs-Division (Kroatien)de로 지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인으로 구성된 사단과의 차별화를 위해 13번째 무장 산악 사단 SS Handscharde (제1 크로아티아) (13. Waffen-Gebirgsdivision der SS "Handschar" (kroat. Nr. 1)de, 13. oružana brdska divizija SS-a Handžar, također i hrvatska br. 1sh)로 변경되었다. 이 사단은 이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수세기 동안 터키 경찰이 휴대했던 지역 격투용 칼 또는 검을 따서 한트샤르de로 명명되었다. 1944년 2월 15일, 사단은 훈련을 마치고 철도로 NDH로 돌아갔다.

9. 대(對) 파르티잔 작전 (1944년 3월 - 5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큰 대(對)파르티잔 소탕 작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바움 작전을 비롯하여,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는 1944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여러 대파르티잔 작전에 참여했다.

이 사단은 크로아티아 독립국(NDH) 내 보스니아 북동부의 약 6000km2 크기의 지정된 보안 구역을 확보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이 보안 구역은 포사비나, 셈베리아, 마예비차 지역을 사바 강, 보스나 강, 드리나 강, 스프레차 강 사이에서 포괄했으며, 대략 파르티잔 제3군단의 작전 지역과 일치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이 임무를 북쪽 시르미아 지역의 중요한 농업 지역과 Volksdeutsche|폴크스도이체de 정착지를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다.

구출 작전(Operation Save) 이후, 이 사단은 3주 이상 비교적 정체된 상태로 남아 지역 파르티잔의 공격을 처리하고 격퇴했다. 무슬림들은 보스니아로 더 진격하려는 조급함을 보였지만, 정찰대대는 3월 26일 고르니 라히치에서 제36 보이보디나 사단의 파르티잔 제3 보이보디나 여단이 점령한 지역을 공격하면서 사단의 서부 측면에서 격렬하게 교전하여 파르티잔 124명을 사살하고 14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다음 주에 대대는 파르티잔의 몇몇 진지를 더 점령했다. 4월 초, 파르티잔 제16 무슬림 여단의 파르티잔 200명이 사단에 항복했다. 그들은 대부분 파르티잔 대열에 징집된 다양한 무슬림 민병대의 전 구성원들이었다.

마이바움 작전(Operation Maibaum)의 목표는 파르티잔 제3군단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육군 집단 F는 제5 SS 산악군단에게 파르티잔 부대가 세르비아로 건너가는 것을 막기 위해 드리나 강을 따라 봉쇄선을 형성하라고 명령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대 게릴라전 작전 중 하나였으며, 제7 SS 사단과 NDH 부대가 포함되었다. 제13 SS 사단은 제5 SS 군단의 지휘를 받았으며, 주요 임무는 투즐라즈보르니크를 점령한 다음 드리나 강과 평행하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다른 군단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원래 계획에는 제500 SS 강하엽병 대대를 블라세니차 지역에 공수하는 것이 포함되었지만, 부적절한 날씨로 인해 취소되었다. 측면 경비는 슈레브르니크 지역의 정찰 대대가 제공했다. 작전 도중 슈프레차 남쪽(보안 구역 외부)으로의 배치는 자우버츠바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단 사령관 플렙스가 명령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고, 결국 히믈러의 개입이 필요했다.

4월 23일, 제28연대는 산길을 따라 투즐라를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음 날 스투파리까지 진격했다. 4월 25일, 제27연대는 즈보르니크를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동시에, 제28연대는 제1/28연대를 블라세니차 방향으로, 제2/28연대는 클라단 방향으로 남쪽으로 보내 4월 27일 클라단을 점령했다. 드리냐차 강의 수위 때문에, 강을 건너 블라세니차 방향으로 진격하는 대신, 제2/28연대는 한 피에사크 방향으로 남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북쪽으로 진격하는 제7 SS 사단의 병력과 만났다.

제1/28연대는 4월 28일 블라세니차를 점령했지만, 거의 즉시 두 개의 파르티잔 사단으로부터 동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세 번째 파르티잔 사단은 블라세니차에서 북서쪽으로 30 킬로미터 떨어진 셰코비치에 있는 제28연대 본부를 포위했다. 제2/28연대와 정찰 대대가 블라세니차로 급파되었고, 제2/28연대는 공격을 받은 제1/28연대를 구출한 다음 셰코비치를 포위했다. 48시간의 전투 끝에 셰코비치는 점령되었다.

셰코비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27연대는 드리나 강 봉쇄선을 더 남쪽으로 확장하여 파르티잔 부대를 매복 공격하고 4월 30일 노바 카사바에 도달했다. 5월 1일 셰코비치의 상황이 개선된 후, 제27연대는 투즐라-즈보르니크 도로 순찰로 복귀했다. 제28연대는 5월 5일 시민 한-로파레 지역으로 이동했고, 제7 SS 사단은 남쪽으로 철수하는 파르티잔을 추격했다.

마이바움 작전은 파르티잔 제3군단이 드리나 강을 건너 세르비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파르티잔 부대를 분산시켰다. 5월 6일, 제5 SS 산악군단은 사단에게 슈프레차 북쪽의 보안 구역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9. 1. 베크바이저 작전 (Operation Wegweiser)

Operation Wegweiserde (베크바이저 작전)은 1944년 3월 9일부터 12일까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가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이다. 이 작전의 목표는 자그레브-베오그라드 철도를 위협하던 파르티잔 부대가 점령한 시르미아 지역의 일부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파르티잔 부대는 보수트 주변의 숲과 사바 강을 따라 있는 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단이 이 지역에 진입하자 파르티잔 부대는 적극적인 교전을 피하며 남동쪽으로 후퇴했다.

NDH의 지도. 사단이 작전을 수행한 보스니아 동부 지역이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단장 자우버츠바이크는 파르티잔 부대원 573명이 사망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주장했다. 호어(Hoare)는 사단이 작전 중에 수백 명의 세르비아인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블라디미르 데디예르와 안툰 밀레티치에 따르면, 보수트에서 223명, 스레므스카 라차에서 352명, 야메나에서 7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노인, 여성, 어린이였다. 이 작전으로 보수트 숲을 정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르티잔 부대는 작전이 끝난 직후 곧 이 지역으로 돌아왔다.

9. 2. 구출 작전 (Operation Save)

1944년 3월 15일, 셈베리야 지역에서 파르티잔을 몰아내기 위한 구출 작전(Operation Save)이 시작되었다. 자우버츠바이크는 사단에 공개 서한을 보내, 병사들에게 최고의 무기와 조국 해방이라는 이상을 강조하며 사기를 고취시켰다. 그는 또한 각 지휘관에게 부대가 사바 강을 건널 때 "보스니아 해방"과 "무슬림 알바니아" 해방이 목표임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읽도록 명령했다.

제27 연대는 보산스카 라차에서 새벽에 사바 강을 건넜고, 나머지는 브르치코에서 격렬한 포격의 엄호 아래 강을 건넜다. 파르티잔 병력과 즉시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들은 숲으로 빠르게 후퇴했다. 지원 부대는 사바 강 북쪽 빈코브치에 남아 영구 주둔지가 되었다. 제27 연대는 파노니아 평원을 가로질러 벨리노 셀로를 거쳐 브로다츠까지 쉽게 진격한 다음, 3월 16일 늦게 경미한 파르티잔 저항을 물리치고 비옐리나를 점령했다.

제27 연대가 비옐리나에서 위치를 굳히는 동안, 제28 연대와 사단 정찰 대대(Aufklärungsabteilung)는 마예비차 산 기슭의 푸키스, 첼리치, 코라이를 통과하며 진격했다. 자우버츠바이크는 제28 연대 제2 대대(II/28)가 "첼리치에서 (새로운) 대대장 한스 한케를 선두로 파르티잔 방어를 공격"했고, 적군은 탄약 부족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은 후 격렬한 전투 끝에 철수했다고 기록했다.

해당 지역이 확보되자 첼리치-로파레 도로를 따라 방어 진지가 구축되었고, 중대 규모의 부대가 정찰을 위해 파견되었다. 3월 17-18일 밤, 파르티잔 제16 보이보디나 사단 및 제36 보이보디나 사단의 병력이 코라이와 자브르제에서 제28 연대의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2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9. 3. 부활절 달걀 작전 (Operation Osterei)

Operation Ostereide(부활절 달걀) 작전은 1944년 4월 12일에 코스타 나지 장군이 이끄는 제3군단이 점령한 마제비차 산을 정리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27 연대는 즉시 얀야를 점령하고 도냐 트르노바를 통과하여 독일 전쟁 기계의 중요한 경제적 목표인 우글예비크 탄광에 도달했다. 4월 13일 저녁까지 이어진 전투 후, 제27 연대는 파르티잔 사상자 106명 사망, 45명 포로, 2명 탈영과 많은 양의 무기와 탄약을 보고했다. 연대는 또한 도냐 트르노바 지역의 구호소에서 막대한 양의 의료 물품을 압수했다.

제28 연대는 마치코바크를 통해 남쪽으로 진격했고, 프리보이 주변의 전투에서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제1대대(I/28)가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파르티잔 제3 군단은 16사단과 36 보보디나 사단을 투즐라-즈보르니크 도로 남쪽으로 철수시켰다. 정찰대대는 서부 마제비차로 진격하여 스레브르니크와 그라다차크를 점령한 후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 제1 산악 여단과 연결되었다. 독일군은 Operation Osterei 작전을 주요 성공으로 간주하여 최소한의 손실로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

Operation Osterei의 마지막 단계에서 I/28은 전투에서 철수하여 프리스티나의 코소보로 이전되어 힘러의 명령에 의해 창설된 제21 무장친위대 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제1 알바니아)의 일부를 형성했다. 새로운 I/28은 다른 사단 부대와 신병으로 구성되었다.

Operation Osterei 후반부에는, 경무장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헌터 팀"인 중대 또는 대대 규모의 Jagdkommandosde가 측면에서 여전히 작전을 수행하는 파르티잔을 격파하고 괴롭히는 데 사용되었다. 이 팀들은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380명 이상의 파르티잔을 사살하고 2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4월 중순까지 보안 구역의 절반이 파르티잔으로부터 정리되었다.

9. 4. 5월의 장대 작전 (Operation Maibaum)



이 사단은 NDH 내 보스니아 북동부의 약 6000km2의 지정된 보안 구역 확보를 주 임무로 창설되었다. 보안 구역은 포사비나, 셈베리아, 마예비차 지역을 사바, 보스나, 드리나, 스프레차 강 사이에서 포괄했으며, 대략 제3군단의 작전 지역과 일치했다. 히믈러는 이 임무가 북쪽 시르미아 지역의 중요 농업 지역과 Volksdeutsche|폴크스도이체de 정착지 보호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큰 대파르티잔 소탕 작전이었을 수 있는 마이바움 작전에 참여했다. 1944년 3월부터 5월 사이에는 다른 사단 및 군단 규모의 대파르티잔 작전에도 참여했다.

9. 5. 5월의 종 작전 (Operation Maiglöckchen)

1944년 5월 17일부터 18일까지, 제13 SS 사단은 라디보예 케로비치가 지휘하는 마예비차-투즐라 지역 체트니크 부대와 함께 마예비차에서 여러 파르티잔 여단을 파괴하기 위한 5월의 종 작전(Operation Maiglöckchen)을 시작했다. 파르티잔 부대는 스톨리체 고지에 포위되었다. 포위된 파르티잔을 구출하려는 제16 보이보디나 사단의 시도는 정찰 대대와 제28 연대 병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구원 부대는 스프레차 강을 건너 퇴각했다. 포병 연대의 맹렬한 포격 이후, 포위되었던 파르티잔 부대는 5월 18일 밤 어둠을 틈타 포위망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도주했다. 파르티잔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일례로 제27 동 보스니아 사단의 제17 마예비차 여단은 16명이 사망하고 60명이 실종되었다. 5월의 종 작전 이후, 제27 연대는 즈보르니크 인근에, 제28 연대는 스레브레니크 인근에 배치되었다.

10. 현지 부대와의 협력

제13 SS 사단 사령관 데시데리우스 함펠(SS-Standartenführer)이 1944년 여름에 체트니크 사령관과 회담하고 있다.


마이글뢰켄 작전 이후, 사단은 방어적인 자세로 전환하여 파르티잔이 보안 구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데 주력했다. 사단은 보안 구역에 도착한 이후부터 다양한 현지 부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다음 부대들이 포함되었다.

부대 종류규모 및 특징
체트니크 부대13,000명 규모의 4개 부대
Zeleni kadar|젤레니 카다르hr (녹색 간부대)무슬림 민족주의 민병대, 대부분 파르티잔에 합류
우스타샤 민병대, 크로아티아 국방군효과적이지 못함



이들은 파르티잔과 함께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구성원들의 탈영을 동시에 장려하려 했다. 그러나 1944년 3월부터 6월까지 이러한 시도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해 200명 미만의 탈영병만 발생했다.

1944년 7월 14일, 작전 플리겐패퍼(Operation Fliegenfänger, 파리 잡기)가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오스마치 지역에서 투즐라즈보르니크 도로 남쪽, 투즐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6km 떨어진 곳에 있는 임시 파르티잔 활주로와 이를 경비하는 파르티잔 부대를 파괴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활주로는 보안 구역의 남쪽 경계 바로 북쪽에 있었으며, 연합군 항공기가 물품을 수송하고 부상당한 파르티잔을 이탈리아로 후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7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제27 동보스니아 사단의 제19 비라치 여단이 활주로를 건설했으며, 7월 6/7일 밤에 첫 비행이 이루어졌다. 제19 비라치 여단은 활주로 방어도 담당했다. 제27 연대의 두 개 대대와 마예비차의 체트니크 대대 하나가 카파르데–메미치–프르냐보르 선에서 작전을 개시하여,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스마치와 메미치 마을을 점령하고 활주로를 손상시켰다. 그날 오후, 제19 비라치 여단은 반격하여 독일군과 체트니크를 투즐라–즈보르니크 도로 너머로 몰아냈다.

반격이 진행되는 동안 파르티잔 제3 군단 사령부는 제36 보이보디나 사단에게 활주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이 지역에서 적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7월 14/15일 밤, 제36 보이보디나 사단 병력이 오스마치 지역에 도착하여 제19 비라치 여단을 구원했고, 제19 비라치 여단은 스레브레니차 방향으로 이동했다. 7월 16/17일 밤, 연합군 항공기가 오스마치에 장비를 전달했고, 약 100명의 부상당한 파르티잔이 이탈리아로 공수되었다.

독일군 보고서에 따르면 파르티잔 42명이 사망했고, 사단 측의 손실은 사망 4명, 부상 7명이었다. 파르티잔 부대는 남쪽의 블라세니차–라이치 지역으로 후퇴했다. 체트니크 대대와의 협력은 제9 SS 산악 군단 전사에서 "효과적"으로 묘사되었다.

11. 대(對) 파르티잔 작전 (1944년 6월 - 8월)

1944년 5월 25일, 독일군이 보스니아 서부 드르바르에서 티토를 체포하거나 암살하려 시도했던 기사 이동 작전 이후, 파르티잔 지도부는 전면적인 봉기를 명령했다. 이에 파르티잔 제3군단은 독일군 및 현지 동맹군과 교전하여 그들을 격파하기 위해 3개의 사단급 부대를 북쪽으로 진격시키는 공격을 계획했다. 이 부대들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지휘 부대지휘관
서부 열제16 보보디나 사단
중앙 열제38 동보스니아 사단
동부 열제36 보보디나 사단마르코 페리치


작전 볼몬트 (1944년 6월 6일 ~ 6월 12일)Operation Vollmond|보름달 작전de은 1944년 6월 6일 저녁, 정찰대대가 파르티잔군이 투즐라-즈보르니크 도로를 건너는 것을 관찰한 직후 급하게 계획되었다. 자우버츠바이크의 목표는 동쪽과 북쪽에서 공격하여 전진하는 파르티잔군을 드리나 강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파르티잔 "서부 열"의 규모를 과소평가하여, 그들의 경로에 단 하나의 대대(I/28)만을 배치했다. 이 대대에는 신병들이 많았으며, 로파레 동쪽에 배치된 두 개의 포병 연대 포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6월 7일, 파르티잔군은 I/28대대를 흩어버렸고, II/28대대가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제16 보보디나 사단은 4문의 150mm 포와 1정의 기관총으로 구성된 7/AR13 포대를 향해 돌진했다. 4시간의 전투 후, 포병들은 소화기 탄약이 바닥나 숲으로 흩어졌고, 포대의 절반이 사망했다. 6월 9일부터 10일까지 II/28대대의 반격으로 제16 보보디나 사단은 그날 오후 철수했고, "서부 열"과 "중앙 열"을 남쪽으로 추격했다. 7/AR13 포대의 포와 차량은 파르티잔에 의해 파괴되었고, 로파레에서 사망한 독일군이 훼손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동부 열"은 제27 연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마지막 파르티잔 제3군단은 6월 12일에 스프레차 강 너머로 밀려났다.

독일 기록에 따르면, 작전 볼몬트 작전으로 사단은 205명이 사망하고, 528명이 부상, 89명이 실종되었다. I/28대대는 180명만 남아 궤멸되었다. 자우버츠바이크는 이 작전에서 3,000명의 파르티잔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플렙스는 이를 "과장된 것"으로 일축했다. 한 독일군의 작전 후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1,500명 이상의 파르티잔을 죽이고 많은 양의 무기와 탄약을 포획했다. 파르티잔 자료에 따르면, 파르티잔 제3군단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사망부상실종
서부 열58명198명29명
중앙 열12명19명17명
동부 열72명142명9명



작전 볼몬트 작전 이후, 제27 연대 지휘관 데시데리우스 햄펠은 친위대 상급지도자(Standartenführerde) 계급으로 사단장이 되었고, 자우버츠바이크는 새로운 군단 본부인 제9무장 산악군단 SS (크로아티아)를 편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28 연대 지휘관 헬무트 라이텔은 새로운 제23 무장 산악사단 SS "카마"(제2 크로아티아)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새로운 군단 본부와 새로운 사단은 헝가리 남부에서 편성될 예정이었다. 제13 SS 사단의 각 중대에서 3명의 부사관과 다른 병력이 제23 SS 사단의 핵심을 형성하기 위해 전출되었다. 새로운 지휘관이 두 개의 산악 보병 연대에 임명되었고, 특히 28연대에 한케가 임명되었다.

햄펠이 지휘를 맡은 직후, 그는 현지 체트니크들이 작전 볼몬트 작전의 전장에서 사단의 장비를 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체트니크 지도자 케로비치와 만나 소화기 탄약과 수류탄 상자를 대가로 장비를 반환하는 데 합의했다.

1944년 6월 나머지 기간과 7월 첫째 주까지, 사단은 파르티잔의 공격적인 침략을 막고, 파르티잔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지 NDH 및 체트니크를 지원하는 데 관여했다. 1944년 여름 동안, 사단의 일부는 투즐라에서 요새를 건설하는 헝가리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노동자들을 경비하는 동안, 그들은 그들에게 잔인한 대우를 했고,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22명을 사살했다.
작전 하이데로즈 (1944년 7월 17일 ~ 7월 23일)사단이 작전 플리겐페에거(Fliegenfänger)를 수행하는 동안 제2 기갑군은 대규모 파르티잔 부대가 중앙 보스니아에서 서부 세르비아로 이동하여 파르티잔을 지원하는 것을 막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제5 SS 산악 군단의 다양한 부대의 가용성 문제로 인해 계획된 작전 로제(Rose)는 취소되었다.

그 동안 사단의 대부분이 보안 구역의 남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함펠은 슈코비치 북서쪽, 스프레차 남쪽의 파르티잔 진지를 목표로 하는 사단급 작전인 Operation Heiderosede(야생 장미)를 계획했다. 제27 연대는 작전 플리겐페에거에서 협력했던 동일한 체트니크 대대에 의해 강화되어 셰코비치 방향으로 동쪽으로 공격할 것이고 제28 연대는 남쪽으로 진격할 것이다. 제7 SS 사단의 분리된 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차단 부대로 활동할 것이었다. 함펠은 제27 연대 신임 지휘관(SS-Obersturmbannführer 헤르만 페터(Hermann Peter))의 성과에 불만을 품고 사단 참모장인 SS-Sturmbannführer 에리히 브라운(Erich Braun)에게 제27 연대를 맡겼다.

7월 17일,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28 연대는 즉시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고, 제27 연대는 심각한 반대 없이 해질 무렵 우드르치의 고지에 올랐다. 7월 18일 초, 체트니크는 마트코바크에서 셰코비치 방향으로 공격했다. 제27 연대는 바치코바크에 도달하여 1944년 7월 19일 셰코비치 남쪽의 고지를 점령했다. 제28 연대는 파르티잔 제36 보조비나 사단을 후퇴시켰다. 제7 SS 사단의 대대는 블라세니차 인근에서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돌파했다. 7월 19일, 제28 연대는 고르네 페트로비체 방향으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지비니체에서 파르티잔 제12 군단을 공격했다. 제7 SS 사단의 정찰 대대는 바레시에서 진격하여 클라단 경유로 후퇴하는 파르티잔을 막는 차단 부대로 활동했다.

그러자 파르티잔은 작전 하이데로즈의 주된 타격을 입은 제36 보조비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16 보조비나 사단을 투입했다. 7월 20일, 두 사단은 제27 연대를 공격했고, 제27 연대는 파르티잔이 큰 사상자를 내고 격퇴된 다음 날 반격을 가했다. 7월 23일, 파르티잔은 해당 지역에서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독일 정보국이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지적한 숨겨진 파르티잔 기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수색한 후, 사단은 10개 이상의 파르티잔 기지를 발견했으며, 협력하는 체트니크는 이전 날에는 파르티잔과 실제로 싸우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전 하이데로즈는 사단에게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파르티잔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900명 이상의 파르티잔이 사망하고 대전차포 1문, 박격포 2문, 기관총 22정, 소총 800정 이상, 소화기 탄약 50만 발에 달하는 대량의 장비가 노획되었다. 사단은 24명이 사망하고 1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공산주의 자료에 따르면 파르티잔은 심각한 손실을 입어 제12 군단만 250명의 사망자, 부상자 및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파르티잔 보고서는 독일군의 손실이 자체 손실보다 훨씬 더 컸다고 추산한다. 에리히 브라운은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추천받았지만, 사단 창설 당시 사단 참모와 플렙스 간에 발생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권고가 지지되지 않았다.
작전 학플라이쉬 (1944년 8월)1944년 8월 초, 제2 기갑군은 원래 작전명 "로즈 작전(Operation Rose)"으로 계획되었던,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로 진격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진격을 막기 위해 마침내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개정된 계획은 작전명 "뤼베찰(Rübezahl)"(산의 정령)로 개명되었고, 제7 및 제13 SS 사단이 작전의 보스니아 단계를 구성하도록 요구했으며, 이는 Operation Hackfleischde(다진 고기)로 명명되었다. Hackfleischde는 치안 지역 남쪽에 있는 클라다니, 블라세니차, 소콜라츠, 올로보 마을 사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파르티잔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체 계획은 파르티잔을 다른 부대의 핀서로 동쪽으로 몰아넣어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부대 이동을 포함했다.

부대 이동은 다음과 같이 임무가 할당되고 구성되었다.


  • 제7 SS 사단의 정찰대는 바레시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올로보 마을 주변의 파르티잔을 공격하여 동쪽으로 몰아낼 예정이었다.
  • 제13 SS 사단 I/28은 리브니차에서 남쪽 및 남동쪽으로 올로보를 향해 공격할 예정이었다.
  • 제13 SS 사단 III/28은 클라다니에서 남쪽 및 남동쪽으로 페트로비치 마을을 향해 진격할 예정이었다.
  • 제13 SS 사단 제27 연대는 셰코비치에서 남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 제7 SS 사단 제14 연대의 일부는 올로보와 소콜라츠 사이에서 북서쪽으로 밀고 나갈 예정이었다.
  • 제7 SS 사단 제13 연대의 일부는 소콜라츠를 통해 북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제27 연대는 블라세니차 근처에서 공세를 시작한 파르티잔 제27 동보스니아 사단 및 제38 보스니아 사단과 격렬한 전투에 휘말렸다. 제27 연대가 전진할 수 없게 되면서 파르티잔 부대를 포위하려는 계획이 달성되지 않았고, 파르티잔은 블라세니차-한 피예사크 도로를 건너 동쪽으로 탈출했다. 다른 파르티잔 부대는 고라즈데 방향으로 후퇴했다.

독일군 입장에서 학플라이쉬 작전은 227명의 파르티잔을 사살하고 50명 이상의 포로를 잡는 등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파르티잔의 세르비아 진격을 늦추었지만 막지는 못했다. 제7 SS 사단이 중앙 보스니아로 후퇴하는 파르티잔 부대를 추격할 수 있도록 I/28과 III/28은 1944년 8월 8일부터 17일까지 이 사단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8월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사단의 잔여 병력은 파르티잔을 치안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다. 파르티잔 제11 크라이나 사단과 제38 보스니아 사단은 빠르게 치안 지역 남부에 침투했고, 제27 동보스니아 사단은 스레브레니차 북서쪽 지역을 건너 브라투나츠를 향해 진격했다. 일련의 신속한 재배치와 대대 및 연대 공격 이후, 사단은 제11 크라이나 사단을 흩어버리고 제27 동보스니아 사단을 궤멸시켰다.

사단은 이제 여름 내내 거의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 사단장 함펠에 따르면, 학플라이쉬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지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피로의 누적 효과, 독일군이 모든 전선에서 직면한 악화되는 상황, 그리고 아마도 파르티잔과 우스타셰에 의해 사단 구성원들에게 퍼진 소문은 1944년 9월 초에 사단의 해체를 시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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